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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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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758년에 태어난 헤이안 시대 초기의 무관이다. 그는 무예가 뛰어난 집안 출신으로, 일찍부터 중앙에서 무관으로 근무했으며, 에미시 정벌에서 세이이타이쇼군으로 활약하여 적대 세력을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무라마로는 805년 참의에 오르고, 다이나곤, 우근위대장 등을 역임하며 중앙 정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또한 청수사 창건에 기여했고, 사후에는 헤이안쿄의 수호신으로 숭배받았으며, 다양한 전설과 관련된 인물로 묘사된다. 811년에 사망했으며, 종2위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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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인물 정보
이름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로마자 표기Sakanoue no Tamuramaro
별칭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坂上田村麿)
사카노우에노 다무라 마루 (坂上田村丸)
대장군
다무라 장군
사카 장군
비샤몬텐 (毘沙門天)의 화신
북천의 화현
신호정1위 다무라 대명신
다무라 대신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공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장군
묘소교토부교토시야마시나구니시노야마이와가야초의 니시노야마 고분군
시마네현오치군오난초 닛칸의 호코지 묘소
관위무쓰데와안찰사 겸 무쓰노카미
정3위
대납언
우근위대장
시종
병부경
참의
진수부장군
정이대장군
증종2위
주군고닌 천황
간무 천황
헤이제이 천황
사가 천황
씨족사카노우에기미 → 사카노우에노 오오기미 → 사카노우에노 오오숙녜
생애
출생758년
사망811년 6월 17일
묘호조칸지덴 잇핀 호칸 세이기 다이코지
가족 관계
사카노우에노 가리타마로
불명
형제자매이와쓰마로
히로토
다무라마로
다카오누시
나오유미
다카오카이
쓰구노
오유미
마타코
노보리코
배우자다카코 (미요시 기요쓰구의 딸)
자녀오오노
히로노
기요노
마사노
히로오
다카미치
하루코
기타 (계보 참조)
관련 이미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기쿠치 요사이의 전현고실에서)

2. 생애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덴표호지 2년(758년)에 태어나[21]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무쓰 국에서는 현지 토착세력인 에미시와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는데, 엔랴쿠 8년(789년)에는 정동대장군 기노 고사미가 이끌던 관군이 에미시의 지도자 아테루이[22]가 이끌던 에미시군에 대패하기도 했다. 엔랴쿠 11년(791년)에 다무라마로는 세이이타이쇼군 오토모노 오토마로를 보좌하는 정동부사(征東副使)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되어, 엔랴쿠 12년(793년)에 에미시와의 전쟁을 위해 출정했다. 《유취국사》에는 "정동부장군(征東副將軍) 사카노우에노 오오스쿠네(坂上大宿禰) 다무라마로(田村麿) 이하가 에미시를 정벌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다무라마로는 4명의 부사(부장군) 중 한 명이지만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엔랴쿠 15년(796년)에는 무쓰 안찰사(按察使), 무쓰노카미, 진수장군(鎭守將軍)을 겸임하는 등 전방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관직을 겸임했고, 이듬해인 16년(797년)에는 오토모노 오토마로의 후임으로 세이이타이쇼군이 되어 에미시와의 전쟁을 총지휘했다. 엔랴쿠 20년(801년)에 적대 관계에 있던 에미시를 항복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승리 후 잠시 교토로 돌아왔다가 802년에 이사와 성을 쌓기 위해 다시 무쓰로 돌아와 에미시의 지도자 아테루이와 모레(母禮) 등 5백여 인의 항복을 받았다. 다무라마로는 이들을 교토로 데려와 본거지로 돌려보내 남은 에미시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자고 조정에 구명을 호소했지만, 교토 귀족들은 "이리와도 같은 그들의 야심은 번복을 자주 하므로 믿을 수 없다"며 반대하여 결국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엔랴쿠 22년(803년)에는 시바 성을 쌓았다.

엔랴쿠 23년(804년)에 다시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세 번째 원정을 준비했지만, 후지와라노 오쓰구가 "군사를 일으키는 일과 토목공사로 백성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반대했고, 간무 천황도 이를 받아들여 원정은 중지되었다. '세이이타이쇼군'은 임시직이었으나 그 뒤로도 이 칭호를 계속 지녔고, 엔랴쿠 24년(805년)에는 참의(參議) 반열에 올랐다. 다이토 원년(806년)에 주나곤, 다이토 2년(807년)에는 우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헤이제이 천황의 명으로 다이토 원년(806년) 후지산 모토미야 아사마 다이샤를 지었으며, 교토에 기요미즈데라를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사정은 여러 전설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고닌 원년(810년)에는 다이나곤이 되었다. 헤이조 상황사가 천황의 대립에서 다무라마로는 상황으로부터 헤이조쿄로의 환도를 위한 조궁사(造宮使)에 임명되었지만, 구스코의 변에서는 사가 천황을 도왔다. 아들 사카노우에노 히로노가 천황의 명으로 오미 국 관문을 봉쇄하러 간 사이, 다무라마로는 미노 길을 따라 헤이조쿄에서 탈출한 상황이 도고쿠로 가서 군사를 모으지 못하도록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다무라마로는 옥에 갇혀 있던 옛 부하 훈야노 와타마로를 함께 데려갈 것을 천황에게 주청하여 허락받았다. 결국 야마토국 소에카미 군 코시다노무라에서 다무라마로에 의해 도고쿠로 가는 길이 막힌 상황은 헤이조쿄로 돌아와 출가한다.

고닌 2년(811년) 5월 23일에 54세로 병사했다. 사가 천황은 슬퍼하며 하루 동안 정무를 보지 않고 다무라마로를 기리는 한시를 지었다. 사후 종2위가 추증되었다. 묘소는 교토시 야마시나 구의 니시노야마 고묘로 추정된다.

헤이안 시대에 뛰어난 무인으로 존경받아 후대에 여러 전설이 생겨났으며, 일본에서는 패전 전까지 문(文)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무(武)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문무의 상징적 존재로 여겼다.

2. 1. 가계와 출신

사카노우에 씨는 다무라마로의 할아버지 사카노우에노 이누카이나 아버지 사카노우에노 가리타마로 때부터 무예로 이름을 떨친 집안이었다.[21] 덴표호지 2년(758년)에 태어난[21] 다무라마로는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공식 역사 기록인 《속일본기》에 따르면 사카노우에 씨는 중국 후한 한나라 영제의 후손이다.[6][7] 사카노우에 씨의 족보에 따르면 다무라마로는 영제의 14대손이다.[8] 다른 연구에서는 사카노우에 씨의 기원을 아시아 대륙, 아마도 백제를 통해 추적한다.[9]

다무라마로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구분내용
아버지사카노우에노 카리타마로 (종3위 좌경대부 훈2등)
어머니불명
아내미요시 다카코 (미요시 기요쓰구의 딸)
형제사카노우에노 이시즈마로 (종5위하 무츠노카미)
형제사카노우에노 히로토 (종5위하 가이노카미)
형제사카노우에노 타카누시 (종4위하 무사시노카미)
형제사카노우에노 나오유미 (종5위하 이즈미노카미)
형제사카노우에노 타카오 (종4위하 야마토노카미)
형제사카노우에노 웅궁 (무라야마 시로를 칭함)
자매사카노우에노 마타코 (칸무 천황 후궁 부인)
자매사카노우에노 도시코 (후지와라노 우치마로의 부인)
장남사카노우에노 다이노 (종5위하 무츠곤노스케)
차남사카노우에노 히로노 (종4위하 우효에노카미 훈7등)
3남사카노우에노 죠노 (정4위하 우효에노카미)
4남사카노우에노 마사노 (종4위하 우효에노카미 구라인 치부다이후 덴라쿠노카미 기요미즈데라 베츠토)
5남사카노우에노 시게노 (아다치 고로를 칭함)
6남사카노우에노 츠구노 (다이오토나리 쇼로쿠이노조)
7남사카노우에노 츠구오 (무사 시치로를 칭함)
8남사카노우에노 히로오 (종5위하 우콘쇼겐)
9남사카노우에노 타카오 (소사 구로를 칭함)
10남사카노우에노 타카오카 (누바타이 지로를 칭함)
11남사카노우에노 타카미치 (종5위상 야마토노스케 친수장군)
장녀사카노우에노 하루코 (칸무 천황 비, 카츠라노 미야의 모친)
차녀후지와라노 아리카타의 모친 (후지와라노 미모리의 부인)



다무라마로의 자손들은 무문의 가문으로서 무쓰노카미나 무쓰노스케, 친위부장군 등 무쓰국의 고관을 많이 배출했다. 또한 기요미즈데라 벳토, 우효에노카미, 야마토노카미, 명법박사, 사에몬노다이조, 겐비이시 다이조 등을 세습했다.

고닌 원년 11월 23일 (율리우스력 810년12월 23일)에 타치바나노 카치코, 타지히노 타카코, 후지와라노 오나츠와 함께 서위를 받은 사카노우에노 미이코는 사가 천황의 후비로 여겨진다. 호가 스오는 미이코에 대해, 사카노우에 씨의 계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타무라마로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다는 것이 『백가계도고』소재 계도에 보이며, 육국사의 기사에서 미이코를 타무라마로의 자녀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2. 2. 초기 관직 생활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에 태어난[21] 다무라마로는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엔랴쿠 원년(782년) 윤 1월에 일어난 히카미노 카와츠구의 난에서는 아버지 카리타마로가 사건에 연루되어 해관되었지만, 불과 4개월 후 다시 우위사독으로 복직했다.[22] 엔랴쿠 4년(785년) 6월, 카리타마로는 후한의 영제의 자손인 사카노우에 씨가 기미의 비천한 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스쿠네 성을 하사받기를 상표하여 허락받았다. 이에 동족 11성 16명이 기미 성에서 스쿠네 성으로 개성했고, 적류인 사카노우에 씨는 대기미였기 때문에 대숙네라고 칭했다.

엔랴쿠 4년 11월 25일(785년 12월 31일), 안덴 친왕(후의 헤이제이 천황)이 립태자가 되자, 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는 28세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했다. 외위의 5위를 통과하지 않고 종5위하로 승진했기 때문에, 이때쯤에는 사카노우에 씨가 지방적 호족에서 중앙 귀족으로 변신했다는 증거가 된다. 엔랴쿠 5년 1월 7일(786년 2월 10일)에 아버지 카리타마로가 사망하자 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는 1년간 상을 치렀다.

엔랴쿠 6년(787년) 이른 시기에 상을 마치고 근위 장감으로 복귀했다. 3월 22일(787년 4월 14일)에 내장조를 겸임, 9월 17일(787년 11월 1일)에는 근위 소장으로 진급했다. 엔랴쿠 7년 6월 26일(788년 8월 2일)에 근위 소장과 내장조 그대로 에치고노스케를 겸임, 엔랴쿠 9년(790년)에는 에치고노카미로 승격했다.

2. 3. 에미시 정벌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에 태어난[21]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이 무렵부터 무쓰(陸奧) 국에서는 현지의 토착세력인 에미시(蝦夷)와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고, 엔랴쿠(延暦) 8년(789년)에는 정동대장군 기노 고사미(紀古佐美)가 이끌던 관군이 에미시의 지도자 아테루이(阿弖利爲)[22]가 이끌던 에미시군에 대패하기도 했다. 엔랴쿠 11년(791년)에 다무라마로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를 보좌하는 네 명의 정동부사(征東副使)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되어, 엔랴쿠 12년(793년)에 에미시와의 전쟁을 위해 출정했다. 이때의 전쟁에 대해서는 《유취국사》에 "정동부장군(征東副將軍) 사카노우에노 오오스쿠네(坂上大宿禰) 다무라마로(田村麿) 이하가 에미시를 정벌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 다무라마로는 네 명의 부사(부장군)의 한 명이면서 중심적인 역할을 완수했다고 여겨진다.

이후 엔랴쿠 15년(796년)에는 무쓰의 안찰사(按察使), 무쓰노카미, 진수장군(鎭守將軍)을 겸임하는 등 거의 전방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관직을 아우르게 되었고, 이듬해인 16년(797년)에는 오토모노 오토마로의 후임으로 세이이타이쇼군이 되어 에미시와의 전쟁을 총지휘해, 엔랴쿠 20년(801년)에 적대 관계에 있던 에미시를 항복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승리한 뒤 잠시 교토로 돌아왔다가 앞서 자신이 확보한 지역에 이사와(胆澤) 성을 쌓기 위해 802년에 다시 무쓰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에미시의 지도자 아테루이와 모레(母禮) 등 5백여 인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다무라마로는 그들을 교토로 데리고 돌아와, 본거지로 돌려보내어 남은 에미시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자며 조정에 구명을 호소했지만, 교토의 귀족은 "이리와도 같은 그들의 야심은 번복을 자주 하므로 믿을 수 없다"며 반대, 결국 두 사람을 처형하고 말았다. 엔랴쿠 22년(803년)에는 시바(志波) 성을 쌓았다.

엔랴쿠 23년(804년)에 다시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세 번째의 원정을 준비했지만, 이 해에 후지와라노 오쓰구(藤原緒嗣)가 "군사를 일으키는 일과 토목공사로 백성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반대했고, 간무 천황(桓武天皇)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원정은 중지된다. 활약할 기회를 잃었음에도 본래 임시직에 불과했던 '세이이타이쇼군'이라는 칭호를 그 뒤로도 몸에 계속 지닐 수 있었으며, 전공에 힘입어 엔랴쿠 24년(805년)에는 참의(參議)의 반열에 올랐다.

간무 천황을 섬긴 다무라마로는 쇼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어 혼슈 북부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에미시(蝦夷)를 정벌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그들을 정복했다.

2. 4. 중앙 정치에서의 활약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에 태어난[21] 다무라마로는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이 무렵부터 무쓰(陸奧) 국에서는 현지의 토착세력인 에미시(蝦夷)와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고, 엔랴쿠(延暦) 8년(789년)에는 정동대장군 기노 고사미(紀古佐美)가 이끌던 관군이 에미시의 지도자 아테루이(阿弖利爲)[22]가 이끌던 에미시군에 대패하기도 했다. 엔랴쿠 11년(791년)에 다무라마로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오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를 보좌하는 네 명의 정동부사(征東副使)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되어, 엔랴쿠 12년(793년)에 에미시와의 전쟁을 위해 출정했다. 이때의 전쟁에 대해서는 《유취국사》에 "정동부장군(征東副將軍) 사카노우에노 오오스쿠네(坂上大宿禰) 다무라마로(田村麿) 이하가 에미시를 정벌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 다무라마로는 네 명의 부사(부장군)의 한 명이면서 중심적인 역할을 완수했다고 여겨진다.

이후 엔랴쿠 15년(796년)에는 무쓰의 안찰사(按察使), 무쓰노카미, 진수장군(鎭守將軍)을 겸임하는 등 거의 전방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관직을 아우르게 되었고, 이듬해인 16년(797년)에는 오토마로의 후임으로 세이이타이쇼군이 되어 에미시와의 전쟁을 총지휘해, 엔랴쿠 20년(801년)에 적대관계에 있던 에미시를 항복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승리한 뒤 잠시 교토로 돌아왔다가 앞서 자신이 확보한 지역에 이사와(胆澤) 성을 쌓기 위해 802년에 다시 무쓰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에미시의 지도자 아테루이와 모레(母禮) 등 5백여 인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다무라마로는 그들을 교토로 데리고 돌아와, 본거지로 돌려보내어 남은 에미시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자며 조정에 구명을 호소했지만, 교토의 귀족은 "이리와도 같은 그들의 야심은 번복을 자주 하므로 믿을 수 없다"며 반대, 결국 두 사람을 처형하고 말았다. 엔랴쿠 22년(803년)에는 시바(志波) 성을 쌓았다.

엔랴쿠 23년(804년)에 다시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세 번째의 원정을 준비했지만, 이 해에 후지와라노 오쓰구(藤原緒嗣)가 "군사를 일으키는 일과 토목공사로 백성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반대했고, 간무 천황(桓武天皇)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원정은 중지된다. 활약할 기회를 잃었음에도 본래 임시직에 불과했던 '세이이타이쇼군'이라는 칭호를 그 뒤로도 몸에 계속 지닐 수 있었으며, 전공에 힘입어 엔랴쿠 24년(805년)에는 참의(參議)의 반열에 올랐다. 다이토(大同) 원년(806년)에 주나곤(中納言), 다이토 2년(807년)에는 우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의 명으로 다이토 원년(806년) 후지산 모토미야 아사마 다이샤(富士山本宮淺間大社)를 지었으며, 또한 교토에 기요미즈데라(清水寺)를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로 여겨지긴 하지만 절을 짓게 된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고닌(弘仁) 원년(810년)에는 다이나곤이 되었다. 헤이제이(平城) 상황사가 천황(嵯峨天皇)이 대립하게 되자 다무라마로는 상황으로부터 헤이조(平城)로의 환도를 목적으로 한 조궁사(造宮使)에 임명되었지만, 이후 구스코(藥子)의 변에서는 사가 천황을 도와, 아들 사카노우에노 히로노(坂上廣野)가 천황의 명으로 오미 국의 관문을 봉쇄하기 위해 파견된 사이에 다무라마로는 미노의 길을 따라, 헤이조쿄에서 탈출한 상황이 도고쿠로 가서 군사를 모으지 못하도록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다무라마로는 천황에 의해 옥에 갇혀 있던 옛 부하 훈야노 와타마로(文室綿麻呂)를 함께 데리고 갈 것을 천황에게 주청하여 허락받았다. 결국 야마토(大和) 국 소에카미(添上) 군의 코시다노무라(越田村)에서 다무라마로에 의해 도고쿠로 갈 길이 막힌 것을 안 상황은 결국 포기하고 헤이조쿄로 돌아와 출가한다.

2. 5. 죽음과 사후

고닌 2년(811년) 5월 23일,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5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사가 천황은 슬픔을 표하며 하루 동안 정무를 보지 않고 다무라마로를 기리는 한시를 지었다. 사후 종2위가 추증되었다.[5] 묘소는 지금의 교토시 야마시나구 니시노야마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야마시나 구 교토시립 권수소학교 북쪽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묘'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주변은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헤이안 시대에 뛰어난 무인으로 존경받아 후대에 여러 전설이 생겨났으며, 일본에서는 패전 전까지 문(文)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무(武)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문무의 상징적 존재로 여겼다.

우타가와 쿠니요시의 '도카이도 53차' 중, 왼쪽부터 스즈카 산의 요괴, 스즈카 고젠, 그녀의 인도로 요괴 오타케마루를 죽이는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묘사


사가 천황은 다무라마로가 사망하자 그를 잃은 슬픔을 표시하기 위해 많은 양의 비단, 면직물, 쌀을 하사했다. 그의 활, 화살, 화살통 및 칼은 천황의 명에 따라 그의 관에 넣어졌다.[5]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묘는 교토부 야마시나구 칸슈지 히가시쿠리수노초에 있다. 그는 쇼군즈카에 묻힌 사무라이가 아닌데, 쇼군즈카는 오늘날의 교토인 헤이안쿄로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 간무 천황이 묻은 전사의 의식용 조각상이다. 그의 후손 우라베노 스에타케가 그의 활을 물려받았다.

사후, 다무라마로는 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 전설에서 다무라마로는 이민족과의 전쟁을 벌이는 전사가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오니와 강도를 처치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일본 3대 악요괴 중 하나인 오타케마루는 다무라마로에게 살해되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스즈카 고젠과 연결되어 그와 결혼하거나 그를 죽인다고 묘사한다.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쇼린이라는 딸을 두었다. 오토기조시에 따르면 쇼린은 스즈카 산의 수호신이 되었고, 오쿠조루리에서는 그녀가 죽은 후 지장보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기요미즈데라 개산당(타무라당)


교토시 야마시나구의 니시노야마 고묘는 쇼와 48년(1973년)에 지역 역사 고고학 연구가인 도리이 하루오가 조리제 복원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해당 묘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묘일 가능성을 지적했다. 헤이세이 19년(2007년), 교토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교수 요시카와 신지는 기요미즈데라 연기의 고닌 2년(811년) 10월 17일자 태정관부 표제 기술과 당시 지도(조리도)를 기반으로 한 야마시로국 우지군 야마시나향 고도(도쿄 대학 소장)와 대조하여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묘설을 뒷받침했다. 야마시나 니시노야마 고분 출토품 중 혁대 장식석은 삼위 이상 및 사위참의가 사용한 백옥일 가능성이 높고, 철촉 출토는 활과 화살 부장을 의미한다. 기와 연적 연대는 나가오카쿄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피장자는 8세기 말부터 9세기 초에 사망한 공경 클래스의 상급 귀족이며 무관으로 추정되며, 위치, 연대, 내용 모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와 일치한다. 현재는 니시노야마 고분이 묘소로 추정된다.

장군총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기요미즈데라 본당 근처 "개산당(타무라당)"에는 기요미즈데라 창건 대본원으로서 당내 중앙 수미단 위 궤 안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부부 상이 모셔져 있다.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히가시야마의 장군총은 고분 시대 원분 3기로 이루어진 장군총 고분군 중 교토를 내려다보는 히가시야마 봉우리 화정산에 축조된 고분이지만, 왕성진호 수호신으로 여겨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이미지가 투영되어 다무라마로 묘로 생각되어 습합되었고, 『타무라마로 전기』에 기록된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묘에서 북소리나 뇌성이 울린다는 다무라마로 묘 관련 전설이 중세 이후 다무라마로 묘와 혼동 및 동일시된 장군총에도 장군총 동요 전승으로 추가되었다.

미야기현토다군와쿠야정 곤호지와 미야기현이시노마키시 레이요자키 신사에는 분카 7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사후 1000년 연기에 공양탑이 건립되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공원 내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묘


교토시 야마시나구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공원 내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묘"는 메이지 28년(1895년) 헤이안 천도 천년제 때 다무라마로 묘로 정비되었지만, 현재는 구리수노 언덕 일대에 펼쳐진 나카토미 유적 중 하나로 나카토미 씨 유력자 묘로 추정된다. 묘비에는 둥근 안의 차나무 잎 문양이 새겨져 있다.

3. 연보

758년에 태어났으며[21],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791년 정동대장군(征夷大將軍) 오토모노 오토마로를 보좌하는 정동부사(征東副使)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되어, 793년 에미시와의 전쟁을 위해 출정했다. 《유취국사》에는 "정동부장군(征東副將軍) 사카노우에노 오오스쿠네(坂上大宿禰) 다무라마로(田村麿) 이하가 에미시를 정벌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다무라마로는 네 명의 부사(부장군) 중 한 명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796년 무쓰 안찰사(按察使), 무쓰노카미, 진수장군을 겸임했고, 797년 오토마로의 후임으로 세이이타이쇼군이 되어 에미시와의 전쟁을 총지휘했다. 801년 적대 관계에 있던 에미시를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승리한 뒤 잠시 교토로 돌아왔다가 자신이 확보한 지역에 이사와 성을 쌓기 위해 802년 다시 무쓰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에미시 지도자 아테루이와 모레 등 50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다무라마로는 그들을 교토로 데려와 조정에 구명을 호소했지만, 교토 귀족들의 반대로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803년 시와 성을 쌓았다.

804년 다시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세 번째 원정을 준비했지만, 후지와라노 오쓰구가 백성들의 부담을 이유로 반대했고, 간무 천황도 이를 받아들여 원정은 중지되었다. 805년 참의(參議)에 올랐고, 806년 중납언(中納言), 807년 우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헤이제이 천황의 명으로 806년 후지산 혼구 아사마 다이샤를 지었으며, 기요미즈데라를 건립했다고 전해지지만, 여러 전설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810년 대납언(大納言)이 되었다. 헤이제이 상황과 사가 천황의 대립에서 구스코의 변이 발발하자, 사가 천황을 도와 상황이 도고쿠로 가서 군사를 모으지 못하도록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811년 5월 23일 54세로 병사했으며, 사가 천황은 슬퍼하며 하루 동안 정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사후 종2위가 추증되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

연호서기날짜
(구력)
나이내용
호키 11년780년23세근위 장감에 임명되었다.
엔랴쿠 4년785년11월 25일28세정육위상에서 종오위하로 진급했다.
엔랴쿠 6년787년3월 22일30세내탁조를 겸했다.
9월 17일30세근위 소장에 임명되었다.
엔랴쿠 7년788년6월 26일31세에치고노스케를 겸했다.
엔랴쿠 9년790년3월 10일33세에치고노카미를 겸했다.
엔랴쿠 10년791년1월 18일34세군사와 병기의 점검을 위해 도카이도에 파견되었다.
7월 13일34세정동 부사가 되었다.
엔랴쿠 11년792년3월 14일35세종오위상으로 진급했다.
엔랴쿠 12년793년2월 17일35세정동 부사가 정이 부사로 개칭되었다.
2월 21일36세간무 천황에게 사임을 요청했다.
엔랴쿠 13년794년6월 13일37세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이하가 에미시를 정벌했다.
10월 28일37세오토모노 오토마로가 승전을 보고했다.
엔랴쿠 14년795년2월 7일38세종사위하로 진급했다.
2월 19일38세목공두를 겸했다.
엔랴쿠 15년796년1월 25일39세무쓰 데와 안찰사, 무쓰노카미를 겸했다.
10월 27일39세친위 장군을 겸했다.
엔랴쿠 16년797년11월 5일40세세이이 타이쇼군이 되었다.
엔랴쿠 17년798년윤5월 24일41세종사위상으로 진급했다.
7월 2일41세기요미즈데라를 건립했다.
엔랴쿠 18년799년5월42세근위 권중장이 되었다.
엔랴쿠 19년800년11월 6일43세여러 나라에 이배하는 이포를 검교했다.
엔랴쿠 20년801년2월 14일44세절도를 받았다.
9월 27일44세에미시의 토벌을 보고했다.
10월 28일44세헤이안쿄로 귀환하여 절도를 반납했다.
11월 7일44세종삼위로 진급했다.
12월44세근위 중장이 되었다.
엔랴쿠 21년802년1월 9일45세조무쓰국 이사와 성사로 파견되었다.
1월 20일45세도자 한 명을 하사받았다.
4월 15일45세아테루이와 모레 등 50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7월 10일45세아테루이와 모레를 데리고 헤이안쿄 부근에 이르렀다.
엔랴쿠 22년803년3월 6일46세조 시와 성사로 사임을 요청했다.
7월 15일46세형부경이 되었다.
엔랴쿠 23년804년1월 28일47세다시 세이이 타이쇼군이 되었다.
5월47세조 사이데라 장관을 겸했다.
8월 7일47세이즈미 국과 셋쓰 국에 행궁지를 정하기 위해 미시마노 나가츠구와 함께 파견되었다.
10월 8일47세이오노의 사냥에 종사하여 물건을 헌상하고 솜 이백 근을 받았다.
엔랴쿠 24년805년6월 23일48세산기가 되었다.
10월 19일48세기요미즈데라의 땅을 하사받았다.
11월 23일48세사카모토 친왕의 가관에 참석하여 옷을 하사받았다.
다이토 1년806년3월 17일49세황태자가 간무 천황의 붕어를 슬퍼하여 일어나지 않자, 다무라마로와 후지와라노 가도마로가 부축하여 내려갔다.
4월 1일49세후지와라노 웅우를 따라 뢰를 바쳤다.
4월 18일49세중납언이 되었다.
4월 21일49세중위 대장을 겸했다.
10월 12일49세무쓰・데와에 의임 군사와 의임 군기를 임명할 것을 청원하여 허가받았다.
다이토 2년807년4월 22일50세우근위 대장이 되었다.
8월 14일50세시종을 겸했다.
11월 16일50세병부경을 겸했다.
다이토 4년809년3월 30일52세정삼위가 되었다.
고닌 1년810년9월 6일53세헤이조쿄의 조경사가 되었다.
9월 10일53세대납언이 되었다.
9월 11일53세구스코의 변 진압에 출격했다. 다음 날, 상황의 동국행이 저지되어 변은 끝났다.
10월 5일53세기요미즈데라에 인을 하사받았다.
고닌 2년811년1월 17일54세손자 가쓰라 친왕의 사예를 기뻐했다.
1월 20일54세발해 사자를 조집원에서 향응했다.
5월 23일54세야마시로 국의 아와타 별택에서 사망했다.
5월 27일야마시로 국 우지 군 시치조 구다니시사토 구리스무라에 매장되었다. 종이위를 추증받았다.
10월 17일묘지로서 3정을 하사받았다.



이사와 성 청사 지구
청사 정문에서 정전 방향

4. 인물 및 일화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덴표호지 2년(758년)에 태어났다.[21] 아버지 사카노우에노 가리다마로(苅田麻呂)와 할아버지 사카노우에노 이누카이(坂上犬養)는 모두 무예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 다무라마로는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 무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무쓰(陸奧) 국에서는 에미시(蝦夷)와의 전쟁이 격화되었고, 엔랴쿠 8년(789년) 정동대장군 기노 고사미(紀古佐美)가 에미시 지도자 아테루이(阿弖利爲)[22]에게 대패했다. 엔랴쿠 11년(791년), 다무라마로는 정동대장군(征夷大將軍) 오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를 보좌하는 정동부사(征東副使)로 임명되어 엔랴쿠 12년(793년) 출정했다. 《유취국사》에는 "정동부장군(征東副將軍) 사카노우에노 오오스쿠네(坂上大宿禰) 다무라마로(田村麿) 이하가 에미시를 정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엔랴쿠 15년(796년) 무쓰 안찰사(按察使), 무쓰노카미, 진수장군(鎭守將軍)을 겸임했고, 엔랴쿠 16년(797년) 세이이타이쇼군이 되어 엔랴쿠 20년(801년) 에미시를 항복시켰다. 이사와 성(胆澤) 축성을 위해 802년 무쓰로 돌아가 아테루이와 모레 등 5백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다무라마로는 이들을 교토로 데려가 구명을 호소했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처형되었다. 엔랴쿠 22년(803년)에는 시바 성(志波) 성을 쌓았다.

엔랴쿠 23년(804년) 다시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세 번째 원정을 준비했지만, 후지와라노 오쓰구(藤原緒嗣)의 반대와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동의로 중지되었다. 이후에도 '세이이타이쇼군' 칭호를 유지했으며, 엔랴쿠 24년(805년) 참의(參議)에 올랐다. 다이토(大同) 원년(806년) 중납언(中納言), 다이토 2년(807년) 우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의 명으로 후지산 모토미야 아사마 다이샤(富士山本宮淺間大社)와 기요미즈데라(清水寺)를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사정은 불확실하다.

고닌(弘仁) 원년(810년) 다이나곤이 되었다. 구스코의 변에서는 사가 천황을 도왔다. 고닌 2년(811년) 5월 23일, 54세로 병사했다. 사가 천황은 정무를 중단하고 애도했으며, 종2위가 추증되었다. 묘소는 교토시 야마시나(山科) 구 니시노야마(西野山) 고묘(古墓)로 추정된다.

헤이안 시대에 뛰어난 무인으로 존경받았으며, 패전 전까지 문(文)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무(武)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로 불렸다.

「북천의 웅 아테루이 모레의 비」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기요미즈데라


「북천의 웅 아테루이 모레의 비」 뒷면

4. 1. 출생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덴표호지 2년(758년)에 태어났다.[21] 아버지는 사카노우에노 가리다마로(苅田麻呂)이며, 할아버지는 사카노우에노 이누카이(坂上犬養)이다. 사카노우에 씨는 대대로 무예로 이름을 떨친 집안이었다. 다무라마로는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다무라마로가 태어난 정확한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카하시 타카시는 오토모노 스쿠네가 타무라 마을에 살아 그의 딸이 타무라노 오오이라츠메로 불린 것처럼, 지명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면 "헤이조쿄 타무라 마을"(나라시 니즈지초 부근)이 유력한 후보지로 추정하고 있다. 무쓰국 타무라 장에서 태어났다는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 오슈 탄생설이나, 에미시 출신이었다는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 이민설도 존재한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엔랴쿠 12년(793년) 2월 3일 형제인 사카노우에노 히로토가 운비노 죠에이와 함께 종오위하에 승진했는데, 이는 외척인 타카츠노 나이신노의 어머니 사카노우에노 젠코를 통한 친족 관계 때문으로 추정된다.

사카노우에 가문은 후한 영제의 증손 아치왕을 시조로 하는 도래계 씨족인 동한씨와 동족을 칭하며, 대대로 궁술과 사냥을 가업으로 삼아 기사 (달리는 에서 활을 쏘는 것) 등의 무예에 능한 가계였다. 증조부 사카노우에노 오쿠니는 우에지 대위, 조부 사카노우에노 이누카이는 좌위사독, 아버지 카리타마로는 무예로 공경 대우를 받았다.

1910년대에는 캐나다의 인류학자 알렉산더 프란시스 체임벌린 등이 다무라마로가 흑인이라는 기술을 하였고, 캐나다와 미국의 흑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일부는 현재도 퍼져있다(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 흑인설).

4. 2. 용모와 성격

사카노우에 씨는 할아버지인 사카노우에노 이누카이(坂上犬養)나 아버지 가리다마로(苅田麻呂) 때부터 무예로 이름을 떨친 집안이었다.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에 태어난[21] 다무라마로는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다무라마로 전기[18]』나 「다무라마로 훙전[19]」(『일본후기』)에 따르면, 다무라마로는 다음과 같은 용모와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 키는 5척 8촌(약 176cm), 가슴 두께는 1척 2촌(약 36cm)이었다. 마주 보면 뒤로 젖혀져 보이고, 뒤에서 보면 구부정하게 보였다.
  • 눈은 매의 푸른 눈동자처럼 날카로웠고, 귀밑머리는 황금 실을 잣은 듯 빛났다.
  • 무거운 때는 201근(약 120kg), 가벼울 때는 64근(약 38kg)처럼 행동은 민첩하고, 몸가짐은 이치에 맞았다.
  • 화를 내며 눈을 부릅뜨면 맹수도 순식간에 죽을 정도였지만, 웃으며 눈썹을 풀면 어린아이도 곧 품에 안기는 듯했다.
  • 진심은 얼굴에 나타났고, 복사꽃은 봄이 아닌데도 항상 붉었다.
  • 태어나면서부터 굳은 의지를 지녔고, 소나무의 빛깔은 겨울을 보내고도 푸르렀다.
  • 책략은 본진에서 펼치고, 승리를 결정하는 것은 천 리 밖이었다. 화하의 학문을 배우고, 장량처럼 무략이 있었고, 소하처럼 기묘한 계략이 있었다.

4. 3. 신앙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청수의 무대"로 유명한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청수사를 건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건립 유래를 설명하는 연기류에도 이본이 많아, 내용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건립 시기에 대해 호키 11년 (780년)으로 하는 것과 엔랴쿠 17년 (798년)으로 하는 것으로 크게 나뉜다.

청수사 창건에 관해서는, 『군서류종』에 수록된 후지와라노 아키히라가 지은 『청수사 연기』, 에이쇼 17년 (1520년) 제작된 『청수사 연기 그림 두루마리』(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외에도, 『고금저문집』, 『후소략기』의 엔랴쿠 17년 (798년) 기록 등에도 청수사 창건 전승이 실려 있다.

청수사는 자시마사 제2세 엔친과 다무라마로에 의해 자시마사의 지방으로서 개창되었다.

엔랴쿠 24년 (805년) 태정관부에 의해 다무라마로가 사찰 부지를 하사받았고, 고닌 원년 (810년) 사가 천황 친필의 칙허를 받아 사찰 인장 1면을 하사받아 공인된 사찰이 되어, "북 관음사"라는 사찰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또한, 북 관음사에 대해 자시마사는 "남 관음사"라고도 불렸다.

4. 4. 세이이타이쇼군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에 태어난[21] 다무라마로는 일찍부터 중앙에서 근위부(近衛府)의 무관으로 근무했다.

이 무렵부터 무쓰(陸奧) 국에서는 현지의 토착세력인 에미시(蝦夷)와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고, 엔랴쿠(延暦) 8년(789년)에는 정동대장군 기노 고사미(紀古佐美)가 이끌던 관군이 에미시의 지도자 아테루이(阿弖利爲)[22] 가 이끌던 에미시군에 대패하기도 했다. 엔랴쿠 11년(791년)에 다무라마로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를 보좌하는 네 명의 정동부사(征東副使)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되어, 엔랴쿠 12년(793년)에 에미시와의 전쟁을 위해 출정했다.

이후 엔랴쿠 15년(796년)에는 무쓰의 안찰사(按察使), 무쓰노카미, 진수장군(鎭守將軍)을 겸임했고, 이듬해인 16년(797년)에는 오토모노 오토마로의 후임으로 세이이타이쇼군이 되어 에미시와의 전쟁을 총지휘해, 엔랴쿠 20년(801년)에 적대관계에 있던 에미시를 항복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엔랴쿠 23년(804년)에 다시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세 번째 원정을 준비했지만, 이 해에 후지와라노 오쓰구(藤原緒嗣)가 "군사를 일으키는 일과 토목공사로 백성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반대했고, 간무 천황(桓武天皇)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원정은 중지된다. 활약할 기회를 잃었음에도 본래 임시직에 불과했던 '세이이타이쇼군'이라는 칭호를 그 뒤로도 몸에 계속 지닐 수 있었다.

그는 오토모노 오토마로에 이어 두 번째로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엔랴쿠 16년, 엔랴쿠 23년에 걸쳐 생애 두 번 정벌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두 번째는 환임했지만, 후지와라노 오쓰구의 의결에 따라 "군사 및 조작"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출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본래 임시 관직인 정벌대장군으로 계속 재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4. 5. 헤이안쿄의 수호신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헤이안쿄(平安京)를 건설하고 일본의 수도로 삼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뛰어난 무인이자 장군이었던 그는 사후에도 헤이안쿄와 천황을 수호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사가 천황은 다무라마로가 죽은 후에도 그를 기리기 위해 특별한 장례를 치렀다. 다무라마로의 묘는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북소리나 천둥소리와 같은 경고를 울리고, 국가에 반역하는 자를 토벌하는 데 힘을 빌려준다고 전해진다.[21] 사가 천황은 다무라마로의 유품 중 칼 한 자루를 조정 수호의 보검으로 삼아 역대 천황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이처럼 다무라마로는 헤이안쿄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서, "왕성 진호" 또는 "헤이안쿄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교토를 중심으로 그를 숭배하는 마음이 싹텄으며, 이는 여러 전설로 이어졌다.

쇼렌인 문적 경내에 있는 쇼군즈카(将軍塚)는 다무라마로의 묘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헤이안 천도 때 왕성을 수호하기 위해 무장한 토우를 묻은 곳으로, 왕성에 변고가 있으면 흔들린다고 전해진다.[22] 하지만 이 전설은 다무라마로의 묘와는 본래 다른 것이다.[23]

다무라마로는 십일면천수관세음보살을 신앙했지만, 생전부터 북방 수호의 부처인 비사문천의 화신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이는 그가 에미시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무쓰국 극락사는 다무라마로가 에미시 항복을 위해 도바츠 비사문천상 등을 모신 곳으로, 이후 비사문천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기타카미강 유역에는 다무라마로와 결합된 비사문천 신앙이 퍼져나갔다. 여러 곳에 비사문당이 세워졌으며, 이는 오쿠 육군지사・아베씨의 전성기와 일치한다.

11세기 후기에 성립된 군담소설 『무쓰와기』에는 전9년의 역의 전말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활약과 공적을 비사문천의 화신인 다무라마로와 같은 위치에 놓아 칭찬하고 있다.

덴지 3년 (1126년)의 기록에는 오슈 후지와라씨 정청의 일원으로서 사카노우에 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비사문천 신앙은 오슈 후지와라씨의 본거지인 히라이즈미로 퍼져나갔고, 다쓰코쿠 비사문당 전승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오슈 후지와라씨 시대의 히라이즈미에서 다무라마로에게 아쿠로오 전설이 더해져 『아즈마카가미』에 기록되었다.

5. 한국과의 관계

사카노우에 씨는 공식 역사 기록인 《속일본기》에 따르면 중국 후한의 한나라 영제의 후손이라고 한다.[6][7] 사카노우에 씨의 족보에 따르면 다무라마로는 영제의 14대손이라고 한다.[8] 다른 연구에서는 사카노우에 씨의 기원을 백제를 통해 추적하기도 한다.[9]

811년 1월 20일(2월 16일)에는 중납언 후지와라 가즈노마로 등과 함께 전년 말부터 입경해 있던 발해국의 사신을 조집원에 초청하여 향응하는 임무를 맡았다.

6. 전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죽은 뒤 여러 이야기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 전설에서 다무라마로는 단순한 무사가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귀신과 강도를 물리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전설에 따르면, 일본 3대 악귀 중 하나인 오타케마루는 다무라마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스즈카 고젠과의 관계를 다루는데, 다무라마로가 그녀와 결혼하거나 혹은 그녀를 죽였다고 묘사하기도 한다.[5]

다무라마로와 관련된 주요 전설은 다음과 같다:


  • 坂上田村麻呂伝説|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덴세쓰일본어
  • 田村語り|다무라 가타리일본어
  • 그가 坂上田村麻呂夷人説|에미시 출신일본어이라는 설
  • 그가 坂上田村麻呂夷人説#坂上田村麻呂奥州誕生説|오슈에서 태어났다일본어는 설
  •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의 인종적 정체성(그가 아프리카 유산 또는 흑인이라는 설.)


다무라마로는 민간 전승에서 가공의 영웅으로도 등장한다. 미에현·시가현에 걸쳐 있는 스즈카 고개 일대에는 다무라마로가 스즈카 산의 귀신을 토벌한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이와테현, 미야기현, 후쿠시마현을 중심으로 다무라마로 관련 전설이 많이 분포한다. 대부분 다무라마로가 관음 등 특정 신의 도움으로 에미시 정벌이나 귀신 퇴치를 하고, 그에 감사하여 절이나 신사를 건립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전승은 다무라마로가 실제로 활동하지 않았던 지역(아오모리현 등)에도 퍼져 있지만, 교토시청수사를 제외하면 거의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다무라마로가 발견한 온천, 다무라마로가 쉬었던 돌 등 다양한 물건이나 지명이 전해진다.

간토, 주부, 기나이, 주고쿠 지방까지 다무라마로 관련 연기나 전설을 가진 주요 사찰들이 존재한다.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노래 『다무라』가 성립되었고, 오토기조시 『스즈카의 초자』나 무로마치 시대 이야기 『다무라의 초자』 등에서는 다무라마로와 스즈카 고젠의 전승이 채택되어 오미국의 악사 다카마루나 스즈카 산의 오타케마루를 토벌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에도 시대의 도호쿠 지방에 전해져 오쿠조루리의 대표적인 연목 『다무라 삼대기』로 이야기되었다.

7.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주제로 한 작품


  • 사와다 후지코의 소설 무쓰 갑주기일본어 (1981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수상.
  • 다카하시 가쓰히코의 소설 화원일본어 (1999년). 아테루이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싸움을 아테루이·에미시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
  • 사코 레이 저, 얏쓰모리 게이 그림의 블랙 투 더 퓨처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 전일본어 (2017년, KADOKAWA). ISBN 978-4-04-734588-1
  • NHK BS 시대극 화원·북쪽의 영웅 아테루이 전일본어 (2013년, 출연: 다카시마 마사히로)
  • 유키무라의 만화 타무라마로 씨일본어. B's-LOG COMICS 연재.

8. 관련 자료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historique du Japon https://books.google[...] 2002
[2] 서적 Jinnō Shōtōki 1980
[3] 서적 National Geographic Traveler Japan
[4] 웹사이트 Japan 101 http://www.kyopro.ku[...]
[5]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6] 문서 Shoku Nihongi
[7] 웹사이트 Sakanoue no Karitamaro Drawing His Bow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2011-04-02
[8] 문서 Hanawa hokii 続群書類従 Zoku Gunsho Ruiju Series 従十八巻坂上系図 Volume 18 Sakagami Clan's family tree
[9] 웹사이트 Yosha Research 2011-04-04
[10] 웹사이트 坂上田村麻呂伝説 https://www.city.tam[...] 2024-11-28
[11] 웹사이트 坂上田村麻呂伝説 https://www.city.tam[...] 2024-11-28
[12] 문서 田村神社 (甲賀市)
[13] 문서 筑紫神社
[14] 문서 松尾神社 (宝塚市)
[15] 웹사이트 大馬神社おおまじんじゃ http://www.oomajinja[...] 2018-05-09
[16] 웹사이트 ご祭神・由緒-滋賀県 田村神社 http://tamura-jinja.[...]
[17] 웹사이트 年間祭事-滋賀県 田村神社 http://tamura-jinja.[...]
[18]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3-07-19
[19]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3-07-19
[20] 논문 頼朝の征夷大将軍任官をめぐって 2004
[21] 문서 사카노우에씨계도(坂上氏系圖)
[22] 문서 阿弖流爲라고 적은 것도 있다.
[23] 문서 예를 들면 시게노가 '아다치고로(安達五郞)'를 자칭했다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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